[Quito] 수끄레 적응기.
[ Apr 29 Thu 2010 ]
아침에 일어 나자 마자 왁자질껄 하다. 바깥의 광장에서 들려오는 바쁨의 소리, 그리고 호스텔 식당과 거실에서 들려오는 아침 챙겨 먹느라 분주함의 소리.
아침형인간 승재오빠는 벌써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빵 + 아보카도 + 치즈 + 커피. 우린 차에서 물건들도 챙겨 올 겸 나가서 빵도 사 왔다. 1개당 12센트로 엄청 나게 저렴한 빵들. 우린 각자 빵 두 개씩에 쨈을 발라 먹고, 커피도 곁들어 먹는다.
아침 상에 땅콩쨈, 포도쨈, 커피포트, 개인 컵, 커피믹스 까지 셋팅을 하니 다들 부러워 한다. 일반 배낭여행자들은 가지고 다니기 어려운 물품들. 우린 다 있다 ㅋㅋㅋ 가끔 힘들어도 자동차 여행의 장점이랄까…
아침 먹고, 우린 케이블카를 타러 갈까 아님 구시가지 둘러 보는 투어를 할까 망설이는데, 승재오빠가 시장에 같이 가자고 한다. 또 얼떨결에 일정이 바뀌어 버렸지만, 이것도 좋다.
호스텔에서 나와 약 10~15분쯤 걸어 나가자 재래 시장이 보인다. 이제는 우리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재래시장을 남미 전역 곳곳에서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시장 할머니, 아주머니들도 왠지 친근하고 하나라도 더 사주고 싶다. 반면 슈퍼마켓은 물건들을 한데 모아놔서 편하긴 하지만, 내가 쓰는 돈이 큰 자본에게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사면서도 찜찜한 기분이다.
<호스텔 수끄레에서 보는 볼리바르 광장>
요리전문가 1번 한승재, 요리전문가 2번 스머프에 밀려 우린 방관자가 된 기분이다. 우리도 곧잘 요리를 하는 편이지만, 요리할 때 요리사가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돕는거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갈비찜! 지난 번 갈비찜 먹었을 때 참 맛있었다는 소리에 우리도 갈비찜 먹고 싶다고 하자 우리를 위해 선택된 메뉴. 브라보. 소갈비, 마늘, 무우 등을 구입하고, 후식으로는 파인애플까지. 특히나 에콰도르의 파인애플이 싸고 맛도 좋아 항상 파인애플을 먹게 된다. 이렇게 장을 보고 나서는데, 오늘 점심으로 닭똥집을 구워 먹자는 의견이 나와서 다시 점심 재료를 구입한다. 유카와 옥수수, 닭똥집.
시장 한 켠의 파를 파는 곳에서는 할아버지가 열심히 파를 다듬고 계신다. 여긴, 파의 흰 부분만 먹고 녹색 부분은 먹지 않고 버린다. 그래서 바닥에는 파의 밑부분만 한 가득. 우린 용기를 내 파 밑부분을 그냥 가져가도 되냐고 묻자, 흔쾌히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호탕하게 말씀 하신다. 우리는 신이 나 파를 열심히 줍는데, 아저씨의 충격적인 한 마디… "왜? 이거 토끼 주려고?" 우린 우리가 먹을 거라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또 한 마디… " 우린 하얀 부분만 먹어" 다른 사람들도 먹을 거고, 팬더도 먹을 거고, 토끼도 먹을 거니 토끼 줄 게 맞긴 한데, 뭔가 이 찜찜한 느낌은? -_-
이로써 시장 구경은 다 마치고 육교를 건너 다시 호스텔로 돌아 간다. 그런데 마침 학교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방출 되고 있었다. 이 곳의 공립 학교들은 점심을 주지 않기 때문에 항상 점심 전에 학교 수업이 끝난다.
꽤죄죄한 얼굴마저도 사랑스러운 인디오 어린이들이 교복을 입고 일제히 학교에서 나오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 이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간식을 사 먹는 모습도 우리의 어릴 적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도 어렸을 적 학교 마치면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도 구경하고, 솜사탕도 사 먹고,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도 사 먹었는데… 이 곳의 어린이들이 사 먹는 간식의 품목은 다를지 언정 그 모습만큼은 내 어릴 적과 너무 똑 같았다. 가판대에서는 어린이들의 입을 유혹하기 위해 과자, 풍선 껌, 솜사탕, 설탕 뿌린 딸기, 심지어는 소 천엽에 기이하게 생긴 것들도 여럿 있었다.
우리는 그 풍경 자체를 즐길 동안, 이 곳 어린이들은 우리를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치노! 치노! 치노! 치노! 하면서… 하긴 동양인 4명이 함께 다니는 모습이 그들 눈엔 엄청 신기하겠지. 하지만 우린 그들이 우리를 신기해 하는 그 호기심이 싫지 않았다. 만약 소 만한 어른들이 치노! 치노! 치노! 치노! 했으면 왜저래~ 하면서 지나갔겠지만, 어린이들이 호기심에 우리를 바라보고 외치는 치노! 치노! 치노! 치노! 소리가 마냥 귀여웠다.
우린 그 중 몇 명을 잡고 이야기를 나눠 봤다. 그래 봤자 긴 대화는 못 되지만, 그렇게 대화하고 웃는 그 시간들도 좋았다. 절대 선진국에서는 못 느끼는 이런 기분. 등하교시 부모와 동행하거나 스쿨버스에 실려 가는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 호기심도 궁금증도 없었다. 그런데 이 곳 어린이들은 동양인을 신기해 하고 한국에 대해 모르지만 알고 싶어 한다. 우린 짦은 만남이지만 사진기 속에 흔적을 남기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귀여운 어린이들.
<잠시 연애인이 되어 봅니다.>
<밖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집 대문이 잠기질 않습니다.>
<어쩌지...어쩌지?? 문이 잠기지 않아~~ ㅠ ㅠ>
<난....이미 포기 ^^:>
<도와주는 승재 형.>
호스텔에 도착하자 마자, 요리 시작이다. 닭똥집 아사도를 위해, 스머프 오빠는 닭똥집을 손질하고, 승재오빠는 옥상에서 숯을 피운다. 그리고 우린, 유카 튀김.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케찹 찍어 먹으면 맛있으니까. ^^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크게 노래를 부르는 한 청년은 정신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번씩 계속 유카튀김을 집어 먹는다. 뭐, 많으니까. 그런데 물어 보지도 않고 제 것처럼 저렇게 집어 먹는 모습이 썩 좋지는 않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왔다는 두 아가씨는 스파게티 만드느라 정신 없이 바빴다.
수끄레의 주방은 한 마디로 더럽다. 두 마디면 더럽고 바쁘다. 세 마디면 더럽고 바쁘고 있는 게 없다. 심지어 물 빼려고 올려 둔 개인 숟가락까지 도난 당하는 실정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내 물건은 내가 지키고 다 쓰고 나면 무조건 방 안에 보관 해야 하는 곳이다. 이런 열악한 주방사정 때문에 결국은 차 안에서 모든 주방 도구들을 가져와야만 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 보겠다고, 혹은 요리를 좋아해서, 작은 주방 안에서 매일 벌어 지는 요리 전쟁이 수끄레 주방의 풍경이다.
옥상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닭똥집을 숯불에 구워서 먹으니, 꿀맛^^ 한 참 먹는 중에 옥상에 시원하게 비가 거세게 한 판 몰아친다. 지붕 천막이라도 있어 망정이지, 아님 쫄딱 젖을 뻔 했다.
그렇게 유유자적 요리 두 시간, 먹기 30분을 마치고 다시 2층 주방으로 내려 가서는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다. 핏물 빠지게 담가 둔 갈비를 몇 번이나 씻고, 푹~ 끓여야 한다. 그리고 간장과 꿀, 마늘, 참기름 등으로 스머프 오빠가 환상적인 갈비찜 소스를 만들어 내고, 압력솥에 밥도 한다. 갈비찜 향기에 반했는지 일본인 한 명도 와서는 오늘 저녁 같이 먹으면 안 되냐고 묻는다.
'토시' 라는 이 일본인은 연희언니와 성욱오빠가 소개 해 준 끼토아저씨를 만나 밥 먹을 때 차도 한 복판에서 빨간 불마다 공연을 하던 친구 였다. 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다. 우리를 기억 하냐고 묻자, 토시도 기억이 난다고 한다. 토시는 벌써 남미만 2년 째인데 앞으로 더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차도에서 공연한 수입은 하루 평균 10~30 US 정도. 여행자 치고 괜찮은 수입이다. 하루 방값 US 3.5 + 식비를 합쳐도 자기 수입 안에서 해결 할 수 있으니 스스로 돈을 벌며 여행하는 여행자였다. 평생 이렇게 떠돌이로 사는 건 아닌지 걱정은 되지만, 그건 개인의 선택 문제이니 내가 왈가왈부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수끄레에는 토시 같은 사람이 한 무더기도 넘는다. 이 곳에선 우리가 평범한 여행자가 되는 신기한 곳이다. 낮에는 각자 일을 하고, 밤에는 다시 호스텔에 모여 악기 합주도 하고 술도 먹고 노는 곳. 악세서리 만들어 파는 사람들, 3인조를 이루어 남미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그룹, 외발 자전거나 저글링을 하는 사람들, 토시처럼 여의주 쇼를 하는 사람들 등등 온갖 신기한 사람들의 집합소 수끄레. 불편함의 눈으로 바라보던 수끄레를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 보게 되었다.
시간 맞춰 공부 마치고 돌아 온 큰 오빠와 토시도 함께 먹는 저녁 시간. 평소 보다 더 왁자지껄 해졌다. 평소엔 고기를 많이 못 먹는데, 오늘은 많이 먹어 좋다며 환하게 웃는 토시.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보고, 요리하고, 밥 먹고, 요리하고, 밥 먹고를 반복한 대단한 우리 넷. 오늘 하루를 수끄레 적응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싸고 지저분한 곳에서, 저렴하고 재밌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된 오늘. 좋지 아니한가?
저녁 먹고 나니, 3층에 전망 좋은 방이 비었다고 옮길 것인지 묻는다. 귀찮아서 그냥 있을까 하다 방을 가보니 와~ 전망이 너무 너무 훌륭하다. 어둠이 내린 볼리바르 광장에 불 켜진 웅장하며 아름다운 공간이 그대로 내려다 보이는, 프리미엄 붙어도 할 말 없는 그런 곳이 비었는데 고민 할 필요 없이 당장 옮겨야지. 7번 방 강추. 가격은 화장실이 없는 대신(오히려 냄새 안 나서 좋다.) 어제보다 저렴한 2인 기준 US6. 우리 하루 주차장 가격과 똑같군. ㅋㅋ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수끄레에 적응, 아니 점점 중독되어 가는 우리들이다.
<6불 방에서 바라보는 100불짜리 야경>
PS . 수끄레 호스텔에는 한국인 정보록도 있다. 자기가 아는 만큼 남미 정보에 대해 공유할 수 있도록 적어 놓은 것. 우리도 작지만 갈라파고스 정보를 남기고 왔다. 여행하면서 처음 본 한국인 정보록. 신기하기만 하다.